-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것

  빵집 아들의 운명은 도넛이다. 그렇기에 늘 텅 비어 있고, 그 텅 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살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김연수 작가의 깨달음이었다. <청춘의 문장들>에서 그 구절을 읽는 순간 갑자기 나는 나의 운명을 깨달았다. 나는 검은 건반이었다. 마음 어딘가에 늘 어두운 부분이 있고, 그 부분을 밝히기 위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 아무리해도 천성 저 바닥 밑까지 밝은 빛이 어리기엔 나는 좀 많이 어둡고 어느 정도는 불협 화음과 같은 존재였다.

 

 누군가가 도와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나도 나를 도울 수 없었다. 태어나길 검은 건반으로 태어났는데, 별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그것이 피아노 선생님의 딸로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깨달음이었다. 나는 검은 건반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유 없이 지치는 것이었다. 남들은 다 즐거울 수 있는 순간에도 혼자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괜히 사람들이 있는 곳은 피하는 것이었다. 혼자 있는 것이 마음 편한 것이었다. 밖이 불편한 것이었다. 어두운 책에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밝고 희망찬 책에는 왠지 모를 불신이 생기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세상은 결고 그렇게 따뜻하고 밝고 희망차지 않으니까. 햇빛은 피하게 되고, 흐린 날이 되어서야 기분이 좋은 것도 같은 이치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검은 건반이니까. 아무리 해도 그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거니까.

 

이렇게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글은 오랜만에 만나보았다.

나만 이렇게 우울하고 세상일이 벅찬 것일까.

왜 나는 이렇게 무기력하고 나약할까. 왜 나는 우울할까. 항상.

왜 나는 항상 행복하지 않을까.

"내가 이유없이 지치는 이유." 그걸 비로소 깨달았다.

나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던 것이 아니고,

'그저 난 그렇게 태어난 사람'임을.

그리고 나와 닮은 고민을 했었던 다른 사람을 알게 된 반가움.

 

 

 

 

- 일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이건 소제목도 너무 마음에 든다. 일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나로부터 나에게도 예의가 필요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자신에게 맡겨진 시간 안에서, 일상적인 세계의 일상적인 업무에 불후의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 같지 않은 그런 인물에게는, 진실이 어울리지 않는다." - 마이클 커닝햄
나는 막연한 꿈을 꾸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을 버티다 보니 나중에는 내가 무엇을 위해 버티는지도 잊어버렸다. 어느새 내가, 내 청춘이, 내 일상이 불쌍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나였다. 내 일상을 망치고 있는 것은. 내가 범인이었다. 내가 나를 불쌍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를 구원할 의무는 나에게 있었다. 매일은 오롯이 내 책임이었다.

 

마이카에서도 참 많이 되뇌었던 말이었다. 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

내 일상의 우울에 함몰되는 날이 참 많았던 것 같다.

내가 왜 초라하고 불쌍한지, 사소한 일들마저 트집잡듯 낱낱이 집어내고, 그리고 그만큼 더 비참해지고.

매일을 기도하듯 살아야지.

매일을 기도하며 살아야지.

마음이 우울해질 땐 노래를 들어야지. 도망가거나 붙잡히지 말아야지.

밀물처럼 우울이 덮쳐오는 날엔, 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숨 쉬는 것을 잊지 말아야지.

우울할 땐 과일처럼 상큼한 것을 먹고.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유튜브로 뉴에이지 피아노곡도 좀 들어보는거야. 그리고 책도 한 장 꺼내읽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하느님께 기도하기. 모든 걸 맡기고 편안해지기.

 

하지만 내가 결국 도착한 곳은 정신의 지중해였다. 내일의 태양을 기대하지 않는 것. 지금의 이 태양을 남김없이 사는 것. 영원히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영원히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았지만,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시지프처럼. 자신의 불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깨어 있으면서 결국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한 시지프의 공간이 바로 지중해였던 것이다.

묵묵히 하루 살아내기.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 배우다

강백호에게 농구를 잘할 수밖에 없었던 기본기가 있었던 것처럼, 나에게 인생을 잘 살 수 밖에 없는 기본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그 기본기를 키우기 위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고, 여행을 다니고, 뭔가 끊임없이 하고 있다.

 

비옥한 토양의 비유는 어느 직업에나 어울리는 것 같다. 결국에는 '나'를 피워내는 과정이니까.

나도 그렇게 열정 넘치는 사람이면 좋겠다.

바람이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기본기를 어렴풋이 알것만도 같다.

내가 친구들에게 곧잘 하는 이야기가, 마이카를 자퇴하고 오케드 입학을 앞둔 9개월이

나에게 어마어마한 지지대가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책 읽고 그림이나 조금 그리고. 완전하게 휴식을 취했던 나날.

홀로 단단해지기를 연습했던 날들. 혼자 글을 읽고 혼자 기록하고. 혼자 생각하고.

나란 어떤 사람인가. 무엇이 되고 싶은가. 내 구미를 당기는 철학은 무엇인가.

무궁무진하게 주어진 시간들을 나는 마음껏 즐겼다.

덕분에 내가 얼마나 그림이 그리고 싶은지를 다시 상기할 수 있었다.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대학 생활을 접은지 9개월만에. 나는 다시 학교가 가고 싶었다.

 

- 쓰기 위해 산다

 "그래도 불쌍하잖아."

 동생의 그 말에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장례식을 치르라고 말했다. 장례식은 원래 남아 있는 사람을 위한 절차니까. 동생은 아빠에게 감정이 남아 있고, 나는 동생에게 감정이 남아 있으므로. 나는 자리를 지켰다.

알베르 카뮈의 문체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읽고, 듣고, 보고, 경험하고. 지금까지 말한 그 모든 행위가 마지막에 '쓰다'에 도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점일지도 모른다. 나는 읽고서 쓰고, 보고서 쓰고, 듣고서 쓰고, 경험하고서 쓴다. 쓰고서야 이해한다. 방금 흘린 눈물이 무엇이었는지, 방금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왜 분노했는지, 왜 힘들었는지, 왜 그때 그 사람은 그랬는지, 왜 그때 나는 그랬는지. 쓰고 나서야 희뿌연 사태는 또렷해진다. 그제야 그 모든 것들을 막연하게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쓰지 않을래야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나는 많은 것들 가운데 기껏해야 몇 개만 쓸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손가락 사이로 후두둑 떨어져나갈 것이다. 나는 내가 쓴 것을 읽고, 그때의 경험을 음미하고, 손가락 사이로 떨어진 세세한 감정 같은 것들은 잊어버릴 것이다. 죄책감도 없이. 내가 쓴 몇 문장만 경험했다고 믿으며.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믿으며. 그것이 쓴다는 것의 어쩔 수 없는 맹점이다.

 

"요즘은 도무지 일기장에 쓸 말이 없어."

그를 좋아하는 만큼 나는 더 상처받았다. 그래서 썼다. 쓸 수밖에 없었다. 그 불안과 상처를 그에게 다 드러낼 순 없었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자존심이 셌다. 그리하여 말로 하기엔 너무 구차한 그 작은 상처들을 나는 일기장에 털어놓았다. 누군가에게는 털어놓아야 내가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면서는 쓸 말이 없었다. 나를 위로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나는 썼구나.

 

- 살기 위해 쓴다

처음 이 세계로 들어올 때 시험을 쳤다. 여러 문제 중 하나가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시오. 내가 그 사람을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가 그 편지를 본다면 연애 편지로 읽히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친구에게 보내는 일상적인 편지처럼 읽히도록 쓰시오.

 

롤랑바르트식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카피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네 번 괴로운 셈이다. 카피를 잘 못 쓰기 때문에 괴롭고, 그 사실에 스스로를 비난하기에 괴롭고, 내 무능력으로 프로젝트가 덜그럭거려서 괴롭고, 내가 그토록 평범하고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또 괴로워한다. (질투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에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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