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급생. 프레드 울만 저. 황보석 옮김.

* 혹시나 이 소소한 독서 기록을 읽으시는 분께.

제 모든 독서 감상은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탄식을 내뱉으면서 천장을 바라보게 되더라.

 

복잡한 심리 묘사를 너무 짱짱하게 잘 해 놓아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 마냥

마지막 인명부를 읽을까 말까 갈등하는 그 짧은 대목에선

나까지 긴장이 되고, 심장이 조여서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

 

그가 살아있어도, 죽었어도, 나랑은 이제 하등 상관 없는 사람인데 뭐 어떻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살아있으면.

그렇다면 우리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도 우리의 우정을 아직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의 생사를 확인하는 순간엔

나도 모르게 멈칫하게 되었다.

멍하게 다시 한 번 읽고. 먹먹함이 먼저. 그리고 감동이 그 뒤에 물밀려왔다.

그랬구나. 콘라딘은... 그랬구나....

 

그 마지막 페이지:

 

 그렇게 나는 H로 시작하는 이름들만 빼놓고 명단 전체를 훑어 내렸다. 그리고 다 읽어 내렸을 때 나는 우리반이었던 마흔여섯 명 중 스물여섯 명이 천년제국을 위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명단을 내려놓고 - 기다렸다.

 10분을 기다리고, 30분을 더 기다리는 내내 나의 오래전 과거라는 지옥으로부터 온 그 인쇄물을 바라보면서. 그것은 초대도 받지 않고 와서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며 내가 잊으려고 그처럼 애를 썼던 무엇인가를 긁어 올리고 있었다.

 

어린 한스에게 친구와의 원치 않는 이별, 그것도 누군가의 잘못이 아닌 사회의 잘못으로. 그게 나의 잘못인 양 타국으로 도망치듯 떠나야 했던 한스. 처음으로 외톨이에서 벗어나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에게 그런 차가움을 느껴야 했던 한스는 얼마나 그가 잊고 싶었을까.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음 한 편에 묻어두는 동시에, 그 결말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너졌겠지. 인생에서 뜯어내 버린 16년을 통째로 잊고 싶었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내게 들러붙어 괴롭히는 한 이름을 찾아볼 용기를 내거나 나 자신을 다그칠 수 없었다.

 마침내 나는 그 끔찍한 것을 없애 버리기로 했다. 내가 정말로 알고 싶거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를 다시는 보지 못할 텐데 그가 살았건 죽었건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문이 열리고 그가 걸어 들어오는 일은 정말로 불가능한 일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지 않은가?

 나는 조그만 인명부를 집어 들고 막 찢어 버리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내 손을 멈췄다. 그런 다음 마음을 굳게 먹고 떨면서 H로 시작되는 페이지를 펼쳐 읽었다.

 <폰 호엔펠스, 콘라딘.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 처형>

 

 

*

 

그때 아버지는 당대의 증거들이 부족하다고는 해도 유대인들에게 윤리와 지혜와 관용을 가르친 스승으로서, 그리고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예언자로서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음은 믿지만 어떻게 해서 그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여길 수 있는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는 십자가에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는 당신의 아들을 수동적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전능한 하느님, 자신의 아들을 도우러 가려는 갈망이 인간 아버지만도 못한 <성부>라는 개념을 불경스럽고 역겨운 것으로 보았다.

 

*

 

지금도 나는 그 아버지가 그네에 앉아 있는 어린 딸들 중 하나를 어떻게 밀어 주었는지, 아이의 하얀 드레스와 불그스름한 머리칼이 어떻게 새로 돋아난 연푸른색 사과나무 잎사귀들 사이로 빠르게 움직이는 촛불처럼 보였는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최근에 읽은 묘사 중 가장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시각적 묘사를 이토록 서정적인 비유로, 게다가 아버지의 따듯한 사랑까지 마음에 생생하게 그려지게 할 수 있다니.

 

*

 

 

그런 것들은 그저 추상적인 이야기 - 숫자, 통계, 정보였다. 한 사람이 백만 명을 위해 고통스러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세 명의 아이들, 내가 알고 있었고 내 눈으로 보았던 그 아이들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

 

그 무엇으로도 어린 두 소녀와 한 소년이 불에 타 죽은 것을 설명하거나 변명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의 말 모두를 맹렬하게 반박했다. "너 그 애들이 불타는 건 차마 못 보겠지?" 내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그 애의 비명 소리도 못 듣겠지? 그러면서도 네가 두둔을 하고 나서는 건 하느님 없이 살 수 있을 만큼 용감하지 못해서야. 힘도 없고 연민도 없는 하느님이 너나 내게 무슨 소용이지?"

 

 

*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더 이상 삶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이 가치 없으면서도 어떻게 해서인지 유일하게 가치 있는 삶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인 것 같았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슨 목적을 위해? 우리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인류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해야 이 잘 안 되는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을까?

 

 

*

 

 

저녁이 다가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나는 모두들 갈 때까지 기다렸다. 마음속으로 여전히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내가 그를 가장 필요로 하는 이 때에 나를 도와주고 위로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서. 하지만 내가 학교를 나섰을 때 길은 겨울날의 백사장처럼 싸늘하고 텅 비어 있었다.

 

 

 

*

 

 

아마도 어느 날엔가는 우리의 길이 다시 서로 만나겠지. 언제까지나 항상 너를 기억할게, 친애하는 한스! 너는 내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어. 나에게 생각하는 법과 의심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의심을 통해 우리 주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법도 가르쳐 주었어.

 

 

아, 지금 콘라딘의 편지를 다시 읽으니. 콘라딘은 언제나 한스와의 우정에 진정 충실했다고 다시 한 번 느껴진다. 심지어 한스가 떠난 후에도 콘라딘은 한스와의 의리를 지켰다.... 콘라딘은 한스와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한스가 옳다고도 믿고 있었다... 콘라딘이 죽음을 맞은 건 한스가 그에게 (그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왔던 그의 주변 어른들의 가르침과) 사회의 시선에 현혹되지 않고 진실이 무엇인지 묻고 추구하는 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콘라딘.... 너는 이상적인 미래를 정말 믿고 있었구나.... 지금 잠깐은 이렇게 휘청일지 몰라도 미래엔 나아지리라고 생각했구나... 한스가 돌아오는 미래를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리고 히틀러가 네 선택과 믿음을 배신하고

현실이 네 생각과 희망처럼 흘러가지 않으니

한스의 자리를 만들어 주려고 했구나. 이상적인 미래를 네 손으로 이루려고 했구나.

 

 

 

*

 

 

 하지만 나는 더 잘 알고 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 그러니까 훌륭한 책 한 권과 한 편의 좋은 시를 쓰는 일은 결코 하지 못했다는 것을. 처음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했고 돈이 있는 지금은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마음속 깊을 곳에서 나는 나 자신을 실패자로 본다. 그것이 정말로 문제가 되어서가 아니다. 영원의 상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다 실패자들이니까. <죽음은 최후의 어둠이 오기 전에 결국 모든 것이 똑같이 덧없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의 삶에서 자신감을 갉아먹는다>라는 글을 내가 어디에서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 <덧없다>는 것이 옳은 말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내게는 적들보다 더 많은 친구들이 있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쁘기까지 한 순간들, 해가 지는 광경이나 달이 떠오르는 모습, 또는 산꼭대기들에 쌓인 눈을 지켜보는 순간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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