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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8.29 시작의 기술
  2. 2019.08.28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2
  3. 2019.08.26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4. 2019.08.19 동급생

시작의 기술. 개리 비숍 지음, 이지연 옮김.

이거 영어 원제가 Unfuck Yourself 네ㅋㅋㅋㅋ 원초적이고 확 와닿는 제목이다.

맞다. 난 굉장히 스스로를 fuck up 시키는 유형의 사람이다 (최근의 일기만 읽어봐도 적나라하다).

이런 나에게, 어떻게 스스로를 좃되게 하지 않는 지 알려주는 책이 있다면 당장 읽지 않고 무엇하는가.

 

"이 책은 자기 파멸적 독백을 경험해본 이들을 위한 것이다."

자기 파멸적 독백 < 이보다 나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 들어가는 말 ]

- 끊임없이 재잘대는 자신과의 대화, 멈추지 않는 자기 비판. '너는 게을러. 너는 멍청해. 너 정도로는 안 돼.' 이 말을 대체 어디까지 믿는 건지, 그게 스스로를 얼마나 힘 빠지게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채로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극복해보려다 하루가 간다.

 

- 하루하루 일상을 오염시키고 한계를 그어버리는 그 끝없는 의심과 자기기만.

 

-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하루에 5만 가지가 넘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중에서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말, 극복하고 싶거나 물리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가.

 

- 우리가 하는 말과 느끼는 감정 사이에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수백 년간, 어쩌면 수천 년간 이미 알려져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이나 하이데거, 가다머 같은 철학자들은 일상에서 쓰는 언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언어의 문법 속에서도 생각과 현실 사이의 조화를 찾을 수 있다." 

 

- 자기 대화는 우리가 상상도 못할 방식으로 우리를 망쳐놓고 있다.

나는 혼잣말을 굉-장히 심하게 하는데, 스트레스를 받을 수록 더 강박적으로 증세가 나타난다.

머릿속으로 오늘 하루 괴로웠던, 기분을 망쳤던 순간이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괜찮아. 괜찮다니까." 하고 중얼거리거나, 아니면 그 순간 내가 하고 싶었던 말, 그 상황을 무마시키려는 혼잣말을 한다거나. 가장 최악은 "좃같다. 좃같아. 좃같네. 왜 이렇게 좃같지?" 하고 좃같다고 혼잣말로 욕을 하는거다... 정말 상병신이 틀림없다 < 지금 보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내 스스로에게 굉장히 안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거다. 왜 내 자신을 스스로 상병신이라고 해. 남한테는 절대 그런 소리 못하면서!

 

[ 인생이 쉬워지려면 ]

- 아주 약간이라도 부정적인 자기 대화를 나눴을 때 남게 될 감정의 잔여물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 어떤 일이 힘들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실제로 더 힘들어진다. . . . 머릿속 비난의 목소리에 너무 익숙해져서 부정적인 생각이 지금 내 기분이나 행동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미처 깨닫지 못한다.

- 빨래 개기나 설거지처럼 간단한 일은 사실 시간이나 노력이 별로 들어가지 않음에도 우리는 종종 회피한다. 작지만 집요한 이런 '숙제'들이 늘어나고, 때로는 더 크고 중요한 일과 겹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사는 게 버겁다고 생각하기 쉽다.

미친, 너무 내 얘기 아니야?! 예전엔 밥 먹고 바로바로 했던 설거지가, 일주일에 한 번 꼬박꼬박 했던 청소가, 세탁이 끝난 빨래들을 잘 개어서 옷장에 정리해놓는 일이, 갑자기 너무너무 귀찮고, 지긋지긋하고, 버겁게 느껴지는 거다!

혼자 사는 내 인생을 한탄하면서! (나 혼자 사니, 내가 안 하면 집이 더럽고 먹을 것도 똑 떨어지는 이 환경이 싫다고 계-속 생각해왔다.)

 

- 우리는 왜 내 삶의 일부인 특정한 일에 저항할까? 그런 숙제들에 관해 이미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자기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나의 자기대화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상처 느끼기를 거부하면 상처 자체가 사라진다. ]

- 아우렐리우스 같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외부 사건이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믿었다. 내 현실은 내 마음을 가지고 내가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상처 느끼기를 거부하면 상처 자체가 사라진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앗.. 나 오늘 또 customer 한 명의 태도 때문에 마음 아플 뻔 했는데.

( 그래도 좀 나아진게, 기분 나쁨이 올라오려고 할 때마다 얼른 다른 곳으로 시야를 돌려 불쾌함을 누르려고 했다.

이런 건 마음에 품고 있어봤자 내게 독 밖에 안 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손님이 나를 선호하지 않아서 뭐? 그 사람한테 날 좋아할 이유를 납득시켜야 하나?

남이 날 어떻게 대하는 지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남은 나에게 negative한 영향을 주지 못한다! )

 

[ 자주하는 생각은 삶을 바꾼다. ]

- 과학자들은 생각이 실제로 뇌의 물리적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신경가소성'이라고 하는 이 현상은...

살아가면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경험한다. 그러는 동안 뇌는 끊임없이 신경 경로를 만들고 재조정한다. 이 신경 경로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좌우한다. 다행인 점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경로를 수정하게끔 생각의 방향을 튼다는 점이다. 그렇게 생각을 자신의 뜻대로 형성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자기 대화를 통해서다.

 

- '나는 나에게 해로운 방식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말하겠다' 라고 결심해야 한다.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고, 내 문제를 접근하기 쉬운 방식으로 규정한다면, 말 그대로 '세상을 보는 법'과 '세상과 교류하는 법'을 바꿀 수 있다.

 

- 단언 형태의 자기 대화란 지금 당장 여기서 내가 이 순간의 주인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나는 ~이다', '나는 ~를 환영한다', '나는 ~를 받아들인다', '나는 ~라고 단언한다' 라고 말하라. '할 거야', '될 거야' 라는 식의 서사보다는 이게 더 강력한 명령의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이다.

 

[ 시작의 기술 1. '나는 의지가 있어' ]

- "의지가 크면 어려움이 크지 않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인생에서 무엇에 맞닥뜨렸는지, 어떤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저런 상태의 의지를 만들어낼 마음만 있다면, 그게 바로 출구가 되어 노력을 기울이고, 조치를 취하고, 차질을 감당하고, 궁극적으로는 당신이 바라는 인생의 변화와 진전을 가져오게 해줄 것이다.

ㅋㅋㅋㅋ뜬금없이 가히리의 필살염이 떠올랐다. 내가 더 필사적일 수록, 내 필살염이 커진다. 내가 의지를 만들어낼 마음이 클 수록, 내 필살염이 커진다! 야! 난 더 쎄진다!

 

-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서 일을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키운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 . 만약 당신도 이런 경우라면 과제를 여러 개의 의지 표명으로 작게 쪼개라. '일어난다', '침대에서 나온다', '이메일을 열어본다' 처럼 말이다.

- 대부분의 경우 실제로 우리가 맞닥뜨린 과제는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한 경우가 많다. 문제는 우리가 시간을 내서 그 과제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마주한 과제 중에 어떤 것들은 분명히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려움을 넘고 나면 그 반대편에는 꿈꾸던 삶이 펼쳐질 것이다. 우리가 기꺼이 한 번 살아보고 싶은 그런 삶 말이다.

맞아... 흠, 내가 원하는 삶이라.

난 일단 영어를 잘하고 싶어. 네이티브 만큼. 그리고 난 그럴 의지가 있다.

더 이상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영어로 말할 때마다 버벅거리고 싶지 않다. 나는 그렇게 살 의지가 없다.

 

그렇다면... 난 영어 책을 읽고. 영어로 말하고. 영어를 듣는 연습을 더 한다. 간단하다.

 

살을 조금만 더 뺄 의지가 있다. 지금의 내 다리는 조금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기꺼이 저녁 시간의 공복을 즐길, 환영할 의지가 있다.

나는 아침에 요가를 할 의지가 있다.

 

나는 내가 기꺼이 살아보고 싶은 내 모습을 만들어 갈 의지가 있다. 나는 의지가 있다!

 

- 이제는 더 이상 '나는 44 사이즈가 아니니까 게을러' 같은 생각 때문에 거지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필요한 것을 할 의지가 있을 때는 다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정말로 의지가 있는 일은 결코 미루지 않을 것이다. 맡기로 한 책임을 소홀히 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일을 하고 싶은 강렬한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 시작의 기술 2. '나는 이기게 되어 있어' ] 

- 나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무의식 속에서 부모가 자신을 잘못 길렀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 시작의 기술 3. '나는 할 수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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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하며 | 나도 몰랐던 내 상처와 마주하는 일 ]

 

- 이제 난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처럼 우울증을 오랜 시간 그림자처럼 달고 다닌 사람들에겐 오히려 난치병 같은 존재다.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고 나을 수는 있지만 지난하고 힘든 여정을 거쳐야 하는 병. 그래서 완치라는 단어를 버리기로 했다. 삶이란 원래 이렇다는 걸 받아들이며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울감이 찾아올 때마다 다시 익숙한 쾌락으로 돌아가지 않는 방법을 찾아나가고 있다. 연민과 어두움의 방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상처를 불쌍히 여기는 게 아니라, 그저 느끼고 나와 타인의 상처를 재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렇다, 감기가 아니다.

나는 자기혐오와 우울함과 불쾌함을 3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항상 느껴왔다.

어쩌면 고등학생 때도 심각하게 우울했는데, 그 땐 가족과 살았기 때문에 어째어째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스트레스.

나는 스트레스를 항상, 매일매일, 계속 받고 있다...

내가 나를 진심으로 좋아한 게 언제인지...

 

나는 우울해. 그리고 나는 오늘도 OOO를 하지 않았고, 계속 쳐먹기만 하고 뚱뚱하고...

하고 나 자신을 비난하고 싫어하는 것. 이건 습관이다.

실제로 행동으로 바뀌는 것보다 나를 미워하고 헐뜯는 게 편한 방법이니까.

몸은 침대에서 게으르게 누워 있고, 정신으로 나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다.

건강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려면 나 자신을 너무 파고들지 말라는 글이 있었다.

나쁜 버릇이 들었다면, 고치면 된다.

손톱 무는 것을 고치듯이, 바르게 누워 자는 습관을 들이듯이,

새로운 습관을 들이면 된다.

 

나를 비난하고 나를 괴롭힐 때면, '내가 또 나한테 못돼게 구는구나' 하고 자각하고,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거야. 책을 읽든, 요가를 하든, 뭐든지간에.

 

[ 13주 | 사랑받고 싶은 게 뭐가 나빠 ]

 

-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걸 알았고, 과거를 떠안지 못해 없애고 싶어 했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눌러놓았다는 걸 알았고, 현재의 나랑 과거의 나를 분리하지도 못하고 합치지도 못하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

 

- 생각만 하고 있을 때는 감정이 섞여 있잖아요. '그 당시의 감정'을 그대로 품고 있고요. 하지만 말로 꺼냈을 때는 자신을 관찰자 입장에서 평가할 수 있죠. 이성적으로요.

- 말하기 전에는 그때의 기억, 수치심 같은 것들이 몽땅 뒤섞여 있으니까 정말 커다란 일처럼 느껴졌는데, 말로 뱉어버리면 감정이나 시간은 사라지고 언어로만 건조하게 펼쳐지잖아요.

 

- "망가지는 게 뭔가요?" 라고 물어보면 그냥 되는 대로 막 살고 싶다고 했죠. . . 어쩌면 진짜 망가지게 될까 봐, 누군가한테 압박을 받기 전에 선수 쳐서 스스로 압박을 주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부담감을 스스로 처리하는 방식으로요.

무슨 말인지 잘 느껴진다. 완벽주의 게으름뱅이 같은 느낌? 내가 인정 받지 못할 거면 차라리 아예 다 망쳐버려서 기대감도 부담감도 다 없애 버리고 싶다. 하는 해방감을 위한 욕구. 아예 바닥으로 떨어지면 더 내려갈 곳이 없으니까.

- 하지만 압박이나 불안감이 없다면 발전도 없거든요.

내가 그동안 '바보 같다' 고 느껴왔던 내 불안 장애, 강박 장애가 조금은 편안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아예 아무 의미 없는 고통은 아니었구나. 

 

- 제가 남성 중심적인 시선, 사고를 오랫동안 가지고 살았잖아요. 남자한테 잘 보이고 싶었고. 이런 모습들이 너무 혐오스러웠어요. . . "누구나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거 아닌가?" 라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내가 어렸을 때 막 찐따 같이 어떤 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혼자 신경 쓰고 착각하고 그랬던 게 너는 혐오스러워?" 그래서 아니라고 했어요. 진짜 아니거든요. 귀엽죠. 안쓰럽기도 하고. 그러니까 아, 이게 왜 혐오스러운 거야. 당연한 거지. 잘 보이고 싶은 게 뭐가 나빠. 사랑받고 싶은 게 뭐가 나빠.

맞다. 내 스스로 혐오하던 내 모습들은 그냥... 그냥 잘 해보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서. 그냥 남들한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을 뿐인데 다른 사람 마음을 내가 어찌 할 수 없으니 나가 떨어져버렸던 것인데 (어쩌면 나 스스로 내가 '나가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내 친구들도 나에게 별 생각이 없었을 것이고, 내 코워커들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던 내가 '바보같이 행동했다고 믿었던 내 모습'일지도 몰라), 이게 왜 혐오스럽고 날 마구마구 욕했을까.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내 상황에 있었다면 '많이 아팠구나, 그래도 자신을 자책하지마' 라고 했을 텐데.

 

- 자기연민이 저를 많이 고민하게 하는 게, 저도 제가 자기연민이 강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상처에 굉장히 취약해서 상처받은 기억이 너무 많아요. . . . 제가 글을 쓰는 방식은 제가 받은 상처의 기록이 많은데, 이걸 또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 검열을 하면서 '아, 자기연민 쩔어. 피해자 코스프레 쩐다'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거 같아요.

진짜 나랑 너무 닮았다 이 작가는. 1권 때부터 쭉 느껴왔지만 정말 닮았다. 자기연민이 강해서 고민하고, 받은 상처 하나하나 기억하고 기록하고. 그리고 또 이런 내 모습을 걱정하고 비난하고.

 

[ 14주 | 벗어날 수 없는 다이어트 강박 ]

 

- 누구나 다 그런 스트레스가 있다는 사실을, 아무리 내가 즐겁다 하더라도 그 스트레스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스트레스는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정말 행복한 시기에도 모든 것들이 다 좋을 순 없거든요.

 

맞아!!! 맞아맞아

왜 난 '완벽한 행복'의 상태를 추구했던걸까?! 누구나 다 저마다의 고민이 있을텐데.

내가 부러워했던 일 잘하는 코워커들도 (지금 이렇게 써 놓으니 너무 웃기다. 내 코워커들이 스벅 밖에선 어떻게 사는 지도 잘 모르면서. 그냥 가족이랑 사니까, 네이티브니까, 일을 오랫동안 해서 일도 익고 손님들도 좋아하니까 그 사람들 인생이 행복할 거라고 판단했던거야? 역시, 글로 써 놓으면 내 (자기연민, 자기혐오로) 왜곡되었던 시야가 객관화 되면서 얼마나 내가 나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봤는 지 틀린그림찾기 하듯 적나라하게 보여지면서, 깨달음이 온다 (원래 '내가 얼마나 바보같이 살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고 적으려다 말았다. <시작의 기술>이랑 초병렬 독서를 하고 있다보니, 내가 이렇게 습관적으로 뱉던 나를 헐뜯는 말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역시 병렬 독서 굿 b ).

 

좌우지간, 완벽하게 스트레스 없는, ~청정 정신 상태~ 가 아니면 내게 문제가 있는 것 마냥 시름시름 앓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언제나 스트레스는 내가 인생을 사는 이상 당연히 받을 것이고, 거기로부터 벗어나려고 애 쓸 필요가 없다. 나만 아픈 게 아니야, 모두 다 저마다의 힘든 삶이 있는거야. 

 

[ 15주 | 남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습관 ]

 

- 어쩌면 자기 파괴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타인의 눈과 나의 눈을 비슷하게 생각하는 거 같아요.

- 어떤 선택을 할 때, '할까 말까'라는 선택은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서 최후의 선택인 거죠. 조정이나 협상이 생략된 통보잖아요.

- 나도 모르게 내가 그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예측하고 내 생각처럼 이야기한다는 거죠.

 

- 난, 정말 무능력한 인간이 되는 게 싫다. 두렵다.

내가 엄마에게 곧잘 하던 얘기가 있다.

엄마,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건 내가 쓸모 없게 느껴지는 거야. 난 그게 제일 무서워.

난 언제나 항상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급급했다. (생각해보니 일터에서도 매니저가, you're running everywhere, 라고 했었지.

내가 신입이라 더 긴장해서인지는 몰라도, 그만큼 할 일을 계속 찾으려고 하고, 종종 돌아다니는 모습을 다른 사람도 알 줄 몰랐다.)

 

[ 16주 | 눈에 보이는 상처가 필요했어요 ]

 

- 자해하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내 몸에, 눈에 보이는 상처를 내고 싶었다.

 

- 이걸로 죽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건 그냥 나를 상처입히는 도구란 생각.

 

- 다 마음대로 하고 싶어요. 이 정도로 난도질해야 진짜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사 사람들이나 주변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까, 내가 힘든 걸 유난스럽다고......

 

- (상처를) 보여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죠. / 보여주면, '아, 얘 지금 진짜 제정신 아니구나?' 하고 납득하지 않을까요?

- 납득이 왜 필요하냐고요. / 납득했으면 좋겠어요.

- 마지막까지 그들이 나한테 의심을 갖는 부분들을 너무나 친절하게 내 몸을 보여주면서까지, '아픈 걸 보여줄 수 없었지만 이젠 보여주고 떠날게요' 같은 과한 친절이 꼭 필요할까요?

- 나 관종인가? 내가 이렇게 힘들다는 걸 누가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인지 너무 알 것만 같았다.

우울증이란 건 마음의 감기야, 이런 말부터가. 무슨 놈의 감기가 3년 동안 낫지 않냐고요.

내가 3년 동안 너무너무 힘들었다고. 난 아무도 없이 내 방에 틀어박혀 외롭고 우울해서 미치기 딱 좋았다고.

누가 좀 알아줬으면 했다.

그래서 정신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게 너무 답답했다.

'눈에 보이는 상처가 필요했다'는 말이 적합하다.

최근 정말 미치도록 힘들었을 때, 처음으로 자해 생각을 했다.

자해하는 사람들 다 관종에 미친거라고 생각했는데 자해가 그렇게 '하고싶어' 지는 것인줄 처음 알았다.

그 와중에, 하나 있는 커터칼이 더러우니까 파상풍에 걸릴 지도 몰라, 같은 멍청한 핑계를 대면서

사실은 자해 할 용기도 없는 거면서. 그냥 유야무야 넘어갔다.

 

나는 내가 '쳐' 맞는 상상도 자주 한다. 이게 비정상적이라는 자각은 전혀 없었다.

방금 내가 한 상상이 내가 '억울하게 맞는 피해자' 역할을 하는 것임을 깨닫자 좀 놀라웠다.

내가 그렇게 쳐맞아서 얻는 게 뭐지?

남들의 관심.

결국엔 난 남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내 스스로 상처 입혔던 것이다.

물리적인 자해는 할 용기가 안 나고, 정신 자해라는 간편하고 쉬운 방법을 택한 셈이다.

 

관종... 관심 종자.... 그게 나라니.

남들한테서 괜찮냐, 또는 괜찮다. 다 괜찮다, 하면서 날 꼭 안아주는 다독임이 받고 싶었다.

 

근데 그러면 날 꼭 안아주는 상상을 하면 되지, 왜 '맞는다'는 전제를 세우냐고.

위로 받고 싶어요, 하는데 이유까지 필요하냔 말이야.

그냥 내가 힘들었으면 됐지, 내가 나 힘든 걸 알았으면 됐지.

왜 그걸 남들한테 보여주고 납득시키고 싶어하냐고. 정말 말 그대로.

납득이 왜 필요하냐고요. 증명이 왜 필요하냐고요, 정말. 날 괴롭히지 못해 안달난 사람처럼.

 

[ 17주 |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두려워서 ]

 

- 상처를 깊이 긋지 않았으니까 금세 딱지가 지고 흐릿해지잖아요? 상처가 옅어지는 게 싫었어요.

내 아픔의 증거가 희미해지는 게 싫었어요.

- 그래서 그 위에다 반복적으로 그었고요.

 

- 이런 상태로 계속 사는 게 끔찍한 일이라는 건 동의해요. 그런데 이런 상태가 과연 계속 유지가 될까, 거꾸로요.

 

- 지금 비교라는 게, 사실 비교라기보다는 나의 열등감을 강조하려고 이용하는 도구 같아요.

- 나 자신이 사랑스럽다면 내가 지금 왜 죽고 싶고 왜 우울하겠어요. 능력도 마찬가지에요. 우울증이라 의욕이 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것처럼, 우울증에 걸리면 머리도 나빠져요. 집중력도 떨어지고, 기억력도 떨어지고.

 

-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경우도 꽤 많아요. 마치 강박처럼.

. . .그리고 하늘 봐라, 햇빛 봐라 다 좋은 말이니까 해보는 건 좋은데요, 그것을 못하는 본인을 너무 혼내지는 마세요. 

 

- 내 마음 속 타인들은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내 마음 속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은 공격적이다.

나는 항상 눈에 띄지 않으려, 미움 받지 않으려 조마조마 하면서 일상을 대했다.

그렇게 적개심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다보니, 나는 더 주눅 들고 나를 싫어했다.

나만 혼자서 전전긍긍했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게으름 때문인지, 무기력이라고 핑계를 대고 싶은 지 모를, 무더운 여름이었다.

요가를 4달 가까이 쉬었고, 살은 5키로 가까이 쪘다.

그래서 내 자신이 더 혐오스럽게 느껴졌던 것 같다. 아, 저 위에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내가 쓸모없게 느껴지는 거라고 했지. 두번째는 못생겨지는 것. 곧 살이 찌는 것이다.

나는 마르고 싶었다. 말라야 내 자신이 사랑스럽게 보였다. 나는 참, 사랑받으려고 기를 쓰는 사람이었다.

 

[ 22주 | 위선도 솔직함도 온전히 나답게 ]

 

- 저는 제 안에 너무 많은 타인이 있는 거 같아서 그게 싫거든요.

- 관계라는 게 영원히 그대로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요.

- 원래는 소심하게 볼까 봐 하지 못했던 말들을 다 꺼내놓았잖아요. 이런 게 필요해요. 내가 이야기했을 때 상대방의 반응은 예상할 수 없었어요. . . . 내가 상대방의 반응을 예상하면 할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가게 마련이에요. 

 

- 나는 왜 내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과도하게 친절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은 언제든지 날 미워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흠, 이건 잘 모르겠다. 공감은 하는데, 뭔가 더 복잡미묘한...

내가 스타벅스에서 일하면서 (또 나오네, 요새 내 인생의 사건들 원인은 스타벅스밖에 없어서 그런가.)

서비스업, 서비스의 제공자로서의 직무, 같은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게 됐다.

<카리스마 있는 친절함>이 딱 적합하고 이상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을 굉장히 approachable하게는 포장하지만, 절대 얕보이지는 않는 정도의 단단함?

과도한 친절.. 정도로 보이게끔은 하지만 저자세로 기어들어가지는 않는... 설명하기 힘들군.

 

근데 그렇다고 고객들이 나를 미워할까봐 고뇌하는 건 아니다.

(처음엔 그랬을지도. 아니, 그랬었다. 저 손님은 나를 싫어해, 하고 마음아파하고...

이제는 ㅈ까 마인드로 가려고 노력한다.)

그것보단 그냥 내 자신의 프로페셔널함을 위해서 친절함을 제공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게 있어서 Customer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ㅋㅋㅋㅋㅋㅋ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손님들은 나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따뜻하게 대하지만,

그 외의 손님들은... 내가 당신에게 성공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내 일이니까.

나는 스타벅스의 직원이니까. 하는 마음가짐.

 

그리고 이 태도를 스타벅스 내에서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카리스마 있는 친절함만큼 정답인 게 또 있을까.

좋은 사람이지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라고 나를 잘 표현할 수 있길.

 

이전엔 미움받는 것이 무섭고 사랑받고 싶어서 친절하게 대했다면,

이제는 내 자신을 위해서 친절하게 대한다.

 

[ 24주 | 유연한 사고와 쉬어갈 용기 ]

 

-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고 멈추는 이유가 귀찮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나는 우울하다'라고 했을 때, 우울하면 우울하니까 집에만 있게 되고 무기력하고 만나는 사람이 줄어들고 차단되잖아요. 그럴 때면 우울하지 않았을 때 하던 버릇, 행동을 하면서 벗어날 수도 있거든요. 사실 내가 우울하니까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하지만, 이런 행동(은둔하는 습관)을 계속해서 하기 때문에 더 우울해질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세로토닌이 높았을 때(상태가 좋을 때)의 행동을 계속하려고 하고, 그때 모습을 기억해서 조금이라도 닮아가려고 한다면 좋은 날을 만들 가능성을 늘릴 수 있지 않을까요.

 

[ 25주 | 나의 빛나는 부분을 바라볼 수 있도록 ]

 

- 제 우울함의 이유는 명확해 보여요. 이유 없는 우울함은 없는 거 같고요. 지금도 울적한데, 선생님께서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해보라고 하셔서 해봤거든요? . . . 

 

음 그렇군. 방금 생각해본건데,

나도 우울할 때 대부분은 땅끝까지 우울감에 질척하게 젖어서 '우울의 늪 사람화'의 모양새를 띄고 있지만,

그나마 글로 쓸 의지력이 생길 때 아주 마구마구 내 기분을 가장 생생하게 풀어내려고 하는데

거기서 오는 장점이 '글로 표현함으로써 오는 해소' 뿐만이 아니고,

 

내 우울을 글로 비주얼라이즈했다고 해야하나?

지독하게 뭉친 감정의 덩어리를 글로 하나하나 설명해서 이 놈을 분석할 수 있게 만드는 느낌이다.

그.. 웃긴 비유지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두렵지 않다고ㅋㅋㅋ

내가 이래서 우울했군. 내 기분은 이랬군, 하면서 마냥 짓눌려 있던 것에서 벗어나

적어도 어떤 감정 덩어리가 날 괴롭게 하는지는 알 수 있게 되어

그래서 덜 괴로워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나 자신의 고통을 글로 객관화하는 연습을 해야할 듯.

이유 없는 우울함은 없다!

 

-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나는 지나치고 극적인 과거가 없는데도 우울증에 걸렸을까? 왜 우울할까?

-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극단적이고 엄청난 사건이 아닐지라도 그 당시, 그 나이 때에는 커다란 위험으로 다가왔을 거예요.

 

와, 이거 너무 내 고민인데.

이 작가는 이유가 있었잖아!!! ^_ㅠ 이런 고민은 내가 해야하는 거라고...

나야말로 '사랑받고 자란 둘째(막내) 딸'의 표본이고

딱히 어머니 아버지가 나에게 상처를 주신 건... 기억에 없는데.

미스테리다, 왜 내가 이렇게 우울함과 강박증에 극도로 스트레스 받아하는지는.

(나는 아마 친구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그 환경에 대한 영향이 컸던 듯 싶다.

뭐랄까. 난 학창 시절 내내 항상 내 자신을 은따였다고 생각하거든.

고등학교땐 왕따라는 생각에 괴로워했고. 내 자존감을 팍팍 깎아먹는 사건도 많았고.

인종차별도 한 몫 한다고 생각하고....

 

그냥. 학창 시절의 나 하면. 특히 교복 입던 시절의 나는...

친구가 없을까봐 전전긍긍하던 내 모습이 대표적으로 떠오르고.....

 

유학 나온 이후의 나는....ㅎㅎㅎ

외롭지 않은 척, 약하지 않은 척 하려고 연락 한 통 안 오는 핸드폰을 그리 열심히 봤네.

 

친구가 없었던 학창 시절이 원인으로 의심이 되는 것이 아니고 원인이 맞다.)

 

 

우습게도 고등학교 때 아빠와 엄청 부딪히고, 어떤 사건 이후엔 아빠는 앞으로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겠다,

하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지금은 아버지께 품는 애정에 전혀 아무런 걸림돌도 없다.

오히려 좀 짠해지는 편이 맞지. 더 극진히 해드려야 할 것 같고. 엄마도 마찬가지.

 

그냥 이건 내가 착한 딸 콤플렉스가 심해서 그런 것 같다. ㅎ

실제로 ㅁㅇㅋ에서 고통 받았을 때에도 엄마에게 고생했다 소리가 듣고 싶었고,

ㅇㅋㄷ에서 계속 생활비, 식비를 줄여야 한다는 강박에 230불로 한 달을 살았을 때에도

엄마에게 잘했다 소리가 듣고 싶었다. 불행하게 살지만 씩씩하게 사는 캔디를 표방했나. 참나.

지금 보니 어떻게 그런 삶에서 행복이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구만. 내 자신이 날 정신병으로 몰아갔었다 항상.

 

언니가 자유로운 영혼인 것에서도 영향을 받는 듯. 나는 효도하는 딸이 되어야 할 것 같고....

뭘까, ㅁㅇㅋ에서 가장 크게 깨달았던 점 중에 하나가

내가 그동안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아왔었는지, 가족들이 얼마나 내게 큰 지탬목이었는지라...

부모님의 큰 은혜에 보답해야해, 착한 딸이 되고싶다, 칭찬 받고 싶다 하는 욕구가 정말 컸던 듯.

학비도 렌트비도 비싸다보니, 더더욱 생활비에 대한 죄책감이 수반하고.

 

- 무조건 이유를 찾으려는 것도 좀 강박이지 않을까요? 뭐랄까, 배고픔에는 이유가 없잖아요.

 

- 달린 랜서의 <관계 중독>이라는 책에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것을 얻는다. 이것은 낯선 방식이긴 하지만 자존감과 자부심은 이런 내려놓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라는 말이 나와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생각했어요. 저는 늘 외부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잖아요. 계속해서 갈구했죠. 그게 지식이든 애정이든 때로는 자존감까지도요. 하지만 사실 이러한 갈구는 나를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인 거잖아요.

. . . 그냥 있는 그대로의 부족한 나를 받아들이는 게 나을까요?

 

-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아야죠. 늘 내면에 이상화된 기준(완벽한 나)을 만들고 그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해요. 어떻게든 맞춰야 한다는 강박까지 있고요.

 

헐 ... 이것도 내 얘기.

난 심지어 <성공적인 하루를 만드는 몇 가지 기준> 까지 있다.

요가하기. 책 읽기. 그림 그리기. 밥 과식 안하고 (다이어트 식으로... 이놈의 식이 강박) 먹기. 정도?

그리고 이걸 못 지키는 날은 한없이 우울. 한없이 자기혐오. 한없이 바닥으로 내려간다.

출근 하는 날이면 내가 출근해서 내 performance가 어땠는가도 기분 햇살도에 크-게 영향 끼친다.

 

- 나는 공허감을 느끼기에 공허감을 다루는 방법을 안다. 나는 대부분 우울하기에 우울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그렇구나.

 

맞아. 나 옛날 일기에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을 나는 안다" 라고 적었던 적도 있었더랬지.

앞으로는 우울해질 때마다 이렇게 하자고....

뭐가 있을까.

카페 가서 좋아하는 커피 마시면서 그림 그리고, 책 읽기. ㅎㅎㅎ

또 뭐가 있을까. 예쁜 하늘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보고 또 보던 왕가위 영화를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춘광사설을 틀어놓고, 양조위가 먹먹하게 우는 장면을 보는거야.

마치 내 대신 울어주는 듯이.

아파하는 영화 주인공을 보면서 그의 고통이 내 고통인 것처럼 아파하고,

또 그들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모습을 대입시키고.

 

무작정 언니에게 통화를 거는 것도 좋은데.

딱히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얻고 싶지는 않다 (내 우울이 옮을까봐. 그리고 옮을 것이라서.)

 

좌우지간. 핵심은 난 나를 우울하지 않게 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고, 이미 몇 가지는 알고 있다는 점이다.

 

- 부족한 나를 받아들이기보다는, 나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기로 했다. 내게도 빛나는 부분이 많다. 답답할 정도로 보지 안흥려고 했을 뿐이다. 내 세계의 황량한 부분에서만 뒹굴고 있었다면, 푸르고 빛나는 공간에도 머무는 연습을 할 것이다.

 

이 비유 좋다.

난 '나' 라는 행성의 사막 위에서만 앉아있었다. 그리고 난 사막 밖에 없는 인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에 사막 밖에 없는 우주가, 인간이 어딨겠어. 하물며 사막에도 오아시스가 있는데.

그리고.

사막에서도, 밤 하늘에 별은 뜬다.

 

내 행성 반대편엔 푸르고 빛나는 공간이 있을 것이고.

지구가 자전하듯, 내 우울도 느리지만 분명하게 빙그르르 자전해서

언젠간 푸르른 들 위에 앉아있으리라.

 

[ 26주 | 어쨌든 삶은 계속되니까 ]

 

-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생각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그리고 현재 나는 어떤 상태인지 셈해본다. 거리는 상당하고 의욕은 제로다.

 

- 계획대로 먹은 거랑 홧김에 먹은 걸 나눠서 체크를 하면 좋겠어요. 우리가 정서적 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먹는 게 있잖아요. 정서적 허기와 실제로 배고픈 걸 구분해서 적어놓으면 좋겠어요.

 

작가가 사족으로 달아놓은 (점점 다이어트 상담이 되어가는 듯한) <- 이게 너무 웃겼다ㅋㅋ

 

- 아무리 책의 끝이라고 해도 '저는 이제 다 나았습니다!' 이럴 수 없잖아요. 실제로 그렇지도 않고요.

 

맞다. 왜 이 말이 발랄하게 읽혀서 어딘가 웃기지ㅋㅋㅋ

나도.

끝까지 '나는 강박증이 다 나았다' 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면 또 강박 증세가 나타나 혼잣말을 중얼중얼 할 것이고,

나 자신도 어찌 할 수 없이 무한 반복 되는 반추 사고가 나를 정신 지옥으로 몰아가는 날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날이 있으면 다른 날도 있듯이!

당장 일주일 즈음 전의 내가 좃같고 뭐고 꿍얼댔지만 최근에 나는 또 완전히 극복한 것처럼ㅋㅋ

 

그 차이는 열심히 무언가를 읽고 쓰는 행위, 그리고 출근하지 않는 자유에 있다ㅠㅠ

6일 출근은 진짜 지옥이었어... 학교 다니면서도 황금 워라밸이 가능하려나.

 

- 예전의 나는 누군가 때리면 그저 아프니까 '내 몸 전체가 다 아프구나, 나는 약하구나'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다른 부분은 때려도 안 아팠을 수도 있는데 말이죠. 약한 부분을 맞았던 건데 그걸 몰랐던 걸 수도 있어요.

 

- 저를 비하하고 싶지 않아요. 비하하는 말을 멈추는 게 도움이 될까요?

- 내가 하는 말들이 내게 연관성을 주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내 말이 내게 스미는 거죠.

오, 이 말 <시작의 기술>과 겹치네.

- 예를 들어 '이거 최악이야' 라고 한다면 최악이라는 단어를 쓰기보다는 좀 더 구체적으로, 육하원칙까지는 아니더라도 살을 더 붙이면 좋겠어요. 단순히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여러 가지 형용사를 사용해서요. 그러면 내 감정을 조금 더 구체화시킬 수 있거든요. 이해할 수 있게 되고요.

 

- (외로움, 공허감을) 당연히 느끼는 부분이거든요? 느끼기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를 맺잖아요. 정기적으로 무언가를 하면서 외로움을 줄일 수도 있고요. 누구나 느끼는 감정인데, 세희 씨는 공허와 허무감을 너무 일상적으로 느끼다 보니까 '또 이래, 나는 매일 이래. 나는 그냥 외로운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 같아요. 하지만 필요한 감정이에요. 내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도 필요하죠.

맞다. 공허/허무/우울/외로움은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듯 하다.

하지만 내게 필요하다.... 음.. 그래... 필요없는 감정 또한 없다 (자기 비하를 제외하곤).

 

- 누구한테나 있고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내가 그 감정에 부정적인 느낌을 주입해서 생각하는 걸 수도 있어요.

- 하지만 그 감정이 반나절 이상 지속되면 힘들어지니까요. / 반나절 이상 지속시키지 않는 것도 어떻게 보면 숙제죠.

그렇구나. 마냥 이 감정이 물러가길 기다릴 것이 아니고. 반나절 이상 지속시키지 않는 것을 '숙제'로 받아들일 수도 있구나. 아니, 어떻게 보면 내 감정에 내가 주도권을 잡는 거다. 마치 어린 애들한테 4시까지 장난감 정리해놔, 하듯이. 그 전까진 마음대로 내 마음을 어지르게 두더라도, 그 감정이 내 하루, 이틀을 잡아먹게 두지는 않겠다. 반나절만 줄거야.

 

내가 내 감정을 내 주도 하에 '멈출' 수 있다!

 

- 일상의 사이사이마다 지루, 무력감, 공허, 텅 빈 마음이 스친다. 선생님은 공허감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했고, 이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감정을 구멍이라고 치자면, 예전에는 그 구멍을 모조리 채우고 싶었다. 나에게서든 타인에게서든.

'감정의 완벽한 상태'를 추구했다. '완벽한 정신 건강 청정 상태'. 그런게 없다는 걸 이젠 안다.

 

- 이제는 그 누구도 채울 수 없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 구태여 채우지 않아도 되고, 채워질 수도 없는, 누구에게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들이. 그래서 몸의 흉터를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젠 다른 따뜻한 감정을 더 소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 나는 이제 내가 싫지 않다.

와. 정말 멋진 부제이자 마침말이다. 우울증이 나았습니다! 하는 동화같은 결말보다도. 나 사랑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니까, 내가 좋아요, 보다 이제 내가 싫지 않아요. 가 훨씬 와닿고 현실적인 토로이다.

 

- 내가 나 자신이 아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던 시간들.

-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숨을 쉬듯 당연하게 병원을 찾고 . . . 주변 사람들은 더는 의지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는, 마음의 상처도 눈에 보이는 상처와 비슷한 무게로 여겨지는 날이 꼭 오면 좋겠다.

 

아, 드디어 다 읽었다. 1-2권 둘 다! 1권은 오히려 아직 기록 정리를 못했지만.

 

흠..

참 반가운 책이었다. 나랑 닮은 사람을 찾아서.

내 우울함을 얘기하는 데 있어서 지금까지 언니와 있었던 갈등들.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고 못할 거라고 예측했던 주변 사람들.

그래서 더 꽁꽁 숨겨온 내 우울. 강박. 지긋지긋한.

 

나는 나약해서, 의지가 약해서 쉽게 외로움을 타고 내 자신을 싫어하고 고통스러워한다고.

내 타고난 기질 탓이라고, 내 우울을 부정적으로 보고 또 그것 때문에 나를 탓했다.

나 스스로를 향해 못된 말을 차고 넘치게 쏟아내던 하루하루가 있었다.

나를 좋아하지는 않아도 되니까, '싫어하지 않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수 있는걸까.

 

그런데 나와 비슷한 사람이 또 있었다.

나처럼 우울이 일상인 사람이. 내가 싫어서 견딜 수가 없고,

심한 다이어트 강박과 스트레스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무엇을 해도 기승전 내 탓, 자기 비하.

남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재단하고 그랬다.

남들은 나에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나는 항상 최악의 최악의 가정만을 했던 듯 싶다.

 

나도 '난 나를 싫어하지는 않아, 이제는.' 이라고 말할 수 있길.

어쩌면 이제는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공허와 우울을 채워야 할 빈 곳으로 보고 조급해할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구나. 괜찮아. 세상에 완전한 행복은 어차피 없어.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살아가다 보면 홈이 패이는게 당연한 게 아니겠느냐.

훌훌 털어내고 일어나 또 나의 행성 위에서 자전하듯 걸어가고 싶다.

내 별에는 사막도 있고 별천지도 있고. 그 어떤 곳이든 충분히 괜찮다.

 

단편적인 모습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다, 또는 다른 사람을 어떤 사람이다 규정하지 않을래.

다양한 일면을 자각하고 존중할래.

앞으론 좀 더 편안하게 남을 대하고 나를 대할래.

 

우울한 날이 오면 잠깐 우울했다가,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자, 이제 멈춰! 하고 명령할래.

그리고 내가 왜 우울한지, 언어로 구체화시켜서 이름을 붙여줄래.

이랬구나, 이래서 내가 힘들었구나. 하고 내가 내 힘듦을 알아주고 나면 (남들에게 납득시킬 이유가 없음을 알고!)

헬륨 풍선 하늘에 날려 보내듯, 그냥 그렇게 가볍게 보낼 수 있게.

 

난 죽고 싶지만, 그래서 더 멋지게 살고 싶어.

우울했다 행복했다 왔다 갔다 하는 자연스러운 내가 죽지 않고 살아가는 이야기.

 

 

2019.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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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28. 09:03

[ 시작하며 - 별일 없이 사는데 왜 마음은 허전할까 ]

- 나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은 곪아 있는, 애매한 사람들이 궁금하다.

- 지독히 우울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애매한 기분에 시달렸다.

- 오늘 하루가 완벽한 하루까진 아닐지라도 괜찮은 하루일 수 있다는 믿음, 하루 종일 우울하다가도 아주 사소한 일로 한 번 웃을 수 있는게 삶이라는 믿음.

 

 

[ 1주 - 그냥 좀 우울해서요 ]

- 시끄럽게 하는 사람한테 조용히 하라는 말을 못 했다고 누가 그렇게 괴로워할까요? 마치 '어떻게 해야 나를 괴롭힐 수 있을까?' 의 고민 속에 있는 사람 같아요.

- '굉장히 불안하고 사회생활 하는 걸 힘들어하는구나. 그리고 실제보다 본인 상태를 더 불편하게 느끼는구나' 정도예요. 자신의 상태를 본인의 주관적인 느낌으로 굉장히 예민하고 우울하게 느끼고 있어요. 미치지 않았는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하는 거죠.

  맞아요, 하지만 제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면 더 괴로워져요. '나는 왜 이렇게 유난일까?' 이렇게요.

 

- 죄책감과 비슷해요. '목을 조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는 자동으로 죄책감이 드는 거죠. 화가 났다가도 바로 죄지은 사람이 되어버려요. 일종의 자기 처벌적인 욕구죠. 나 자신에게 너무도 강력한 초자아가 서 있기 때문이에요(실제 내가 쌓아온 것 말고도 여기저기서 더 좋은 걸 차용해서 이상화된 내 모습을 쌓아놓았다는 것),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이상일 뿐, 현실이 아니에요. 그래서 매번 이상화된 기준에 도달하는 걸 실패하면서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있는 거죠.

 

- 외모 때문에 강박감이 나오는 건 아니에요. 이상화된 내 모습이 있기 때문에 외모에 집착하는 거죠.

- 폭식도 연관이 있나요?

  일상의 만족도가 떨어지면 가장 원시적인 퇴행으로 돌아가요. 먹고 자는 본능적인 거로요. 만족감의 중추를 가장 편한 곳에서 찾는 거죠. 하지만 먹는 건 만족감이 오래가지 않아요. 운동이나 프로젝트 같은 게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장기적인 목표를 통해 극복하는 게 좋지요.

 

- 서로의 친밀함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욕구가 공존하는 모순적인 심리 상태를 '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한다. 나는 늘 혼자이고 싶으면서 혼자이기 싫었다. 의존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의존할 땐 안정감을 느끼지만 불만이 쌓이고, 벗어나면 자율성을 획득하지만 불안감과 공ㄹ허감이 쌓이는 상태.

 

 

[ 2주 - 저 혹시 허언증인가요? ]

- 나는 감정이입을 잘하고, 공감도 잘하고, 또 공감을 잘해줘야 한다는 강박까지 있어서 상대가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나도 그런 적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했다. 웃기고 싶고 관심받고 싶을 때면 또 거짓말을 하고, 동시에 스스로를 자책하고.

- 저 관심종자 같아요. 인정욕구도 강하고, 그래서 허언증이 있나 봐요.

 

- 누군가 나한테 선물을 주면 '나도 언젠가는 갚아야 해'라고 생각하지 말고 기뻐하고 현재를 즐기세요. 지금은 고마워하면서도 동시에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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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26. 11:58

동급생. 프레드 울만 저. 황보석 옮김.

* 혹시나 이 소소한 독서 기록을 읽으시는 분께.

제 모든 독서 감상은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탄식을 내뱉으면서 천장을 바라보게 되더라.

 

복잡한 심리 묘사를 너무 짱짱하게 잘 해 놓아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 마냥

마지막 인명부를 읽을까 말까 갈등하는 그 짧은 대목에선

나까지 긴장이 되고, 심장이 조여서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

 

그가 살아있어도, 죽었어도, 나랑은 이제 하등 상관 없는 사람인데 뭐 어떻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살아있으면.

그렇다면 우리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도 우리의 우정을 아직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의 생사를 확인하는 순간엔

나도 모르게 멈칫하게 되었다.

멍하게 다시 한 번 읽고. 먹먹함이 먼저. 그리고 감동이 그 뒤에 물밀려왔다.

그랬구나. 콘라딘은... 그랬구나....

 

그 마지막 페이지:

 

 그렇게 나는 H로 시작하는 이름들만 빼놓고 명단 전체를 훑어 내렸다. 그리고 다 읽어 내렸을 때 나는 우리반이었던 마흔여섯 명 중 스물여섯 명이 천년제국을 위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명단을 내려놓고 - 기다렸다.

 10분을 기다리고, 30분을 더 기다리는 내내 나의 오래전 과거라는 지옥으로부터 온 그 인쇄물을 바라보면서. 그것은 초대도 받지 않고 와서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며 내가 잊으려고 그처럼 애를 썼던 무엇인가를 긁어 올리고 있었다.

 

어린 한스에게 친구와의 원치 않는 이별, 그것도 누군가의 잘못이 아닌 사회의 잘못으로. 그게 나의 잘못인 양 타국으로 도망치듯 떠나야 했던 한스. 처음으로 외톨이에서 벗어나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에게 그런 차가움을 느껴야 했던 한스는 얼마나 그가 잊고 싶었을까.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음 한 편에 묻어두는 동시에, 그 결말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너졌겠지. 인생에서 뜯어내 버린 16년을 통째로 잊고 싶었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내게 들러붙어 괴롭히는 한 이름을 찾아볼 용기를 내거나 나 자신을 다그칠 수 없었다.

 마침내 나는 그 끔찍한 것을 없애 버리기로 했다. 내가 정말로 알고 싶거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를 다시는 보지 못할 텐데 그가 살았건 죽었건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문이 열리고 그가 걸어 들어오는 일은 정말로 불가능한 일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지 않은가?

 나는 조그만 인명부를 집어 들고 막 찢어 버리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내 손을 멈췄다. 그런 다음 마음을 굳게 먹고 떨면서 H로 시작되는 페이지를 펼쳐 읽었다.

 <폰 호엔펠스, 콘라딘.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 처형>

 

 

*

 

그때 아버지는 당대의 증거들이 부족하다고는 해도 유대인들에게 윤리와 지혜와 관용을 가르친 스승으로서, 그리고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예언자로서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음은 믿지만 어떻게 해서 그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여길 수 있는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는 십자가에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는 당신의 아들을 수동적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전능한 하느님, 자신의 아들을 도우러 가려는 갈망이 인간 아버지만도 못한 <성부>라는 개념을 불경스럽고 역겨운 것으로 보았다.

 

*

 

지금도 나는 그 아버지가 그네에 앉아 있는 어린 딸들 중 하나를 어떻게 밀어 주었는지, 아이의 하얀 드레스와 불그스름한 머리칼이 어떻게 새로 돋아난 연푸른색 사과나무 잎사귀들 사이로 빠르게 움직이는 촛불처럼 보였는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최근에 읽은 묘사 중 가장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시각적 묘사를 이토록 서정적인 비유로, 게다가 아버지의 따듯한 사랑까지 마음에 생생하게 그려지게 할 수 있다니.

 

*

 

 

그런 것들은 그저 추상적인 이야기 - 숫자, 통계, 정보였다. 한 사람이 백만 명을 위해 고통스러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세 명의 아이들, 내가 알고 있었고 내 눈으로 보았던 그 아이들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

 

그 무엇으로도 어린 두 소녀와 한 소년이 불에 타 죽은 것을 설명하거나 변명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의 말 모두를 맹렬하게 반박했다. "너 그 애들이 불타는 건 차마 못 보겠지?" 내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그 애의 비명 소리도 못 듣겠지? 그러면서도 네가 두둔을 하고 나서는 건 하느님 없이 살 수 있을 만큼 용감하지 못해서야. 힘도 없고 연민도 없는 하느님이 너나 내게 무슨 소용이지?"

 

 

*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더 이상 삶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이 가치 없으면서도 어떻게 해서인지 유일하게 가치 있는 삶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인 것 같았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슨 목적을 위해? 우리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인류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해야 이 잘 안 되는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을까?

 

 

*

 

 

저녁이 다가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나는 모두들 갈 때까지 기다렸다. 마음속으로 여전히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내가 그를 가장 필요로 하는 이 때에 나를 도와주고 위로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서. 하지만 내가 학교를 나섰을 때 길은 겨울날의 백사장처럼 싸늘하고 텅 비어 있었다.

 

 

 

*

 

 

아마도 어느 날엔가는 우리의 길이 다시 서로 만나겠지. 언제까지나 항상 너를 기억할게, 친애하는 한스! 너는 내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어. 나에게 생각하는 법과 의심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의심을 통해 우리 주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법도 가르쳐 주었어.

 

 

아, 지금 콘라딘의 편지를 다시 읽으니. 콘라딘은 언제나 한스와의 우정에 진정 충실했다고 다시 한 번 느껴진다. 심지어 한스가 떠난 후에도 콘라딘은 한스와의 의리를 지켰다.... 콘라딘은 한스와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한스가 옳다고도 믿고 있었다... 콘라딘이 죽음을 맞은 건 한스가 그에게 (그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왔던 그의 주변 어른들의 가르침과) 사회의 시선에 현혹되지 않고 진실이 무엇인지 묻고 추구하는 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콘라딘.... 너는 이상적인 미래를 정말 믿고 있었구나.... 지금 잠깐은 이렇게 휘청일지 몰라도 미래엔 나아지리라고 생각했구나... 한스가 돌아오는 미래를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리고 히틀러가 네 선택과 믿음을 배신하고

현실이 네 생각과 희망처럼 흘러가지 않으니

한스의 자리를 만들어 주려고 했구나. 이상적인 미래를 네 손으로 이루려고 했구나.

 

 

 

*

 

 

 하지만 나는 더 잘 알고 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 그러니까 훌륭한 책 한 권과 한 편의 좋은 시를 쓰는 일은 결코 하지 못했다는 것을. 처음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했고 돈이 있는 지금은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마음속 깊을 곳에서 나는 나 자신을 실패자로 본다. 그것이 정말로 문제가 되어서가 아니다. 영원의 상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다 실패자들이니까. <죽음은 최후의 어둠이 오기 전에 결국 모든 것이 똑같이 덧없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의 삶에서 자신감을 갉아먹는다>라는 글을 내가 어디에서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 <덧없다>는 것이 옳은 말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내게는 적들보다 더 많은 친구들이 있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쁘기까지 한 순간들, 해가 지는 광경이나 달이 떠오르는 모습, 또는 산꼭대기들에 쌓인 눈을 지켜보는 순간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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