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급생. 프레드 울만 저. 황보석 옮김.

* 혹시나 이 소소한 독서 기록을 읽으시는 분께.

제 모든 독서 감상은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탄식을 내뱉으면서 천장을 바라보게 되더라.

 

복잡한 심리 묘사를 너무 짱짱하게 잘 해 놓아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 마냥

마지막 인명부를 읽을까 말까 갈등하는 그 짧은 대목에선

나까지 긴장이 되고, 심장이 조여서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

 

그가 살아있어도, 죽었어도, 나랑은 이제 하등 상관 없는 사람인데 뭐 어떻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살아있으면.

그렇다면 우리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도 우리의 우정을 아직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의 생사를 확인하는 순간엔

나도 모르게 멈칫하게 되었다.

멍하게 다시 한 번 읽고. 먹먹함이 먼저. 그리고 감동이 그 뒤에 물밀려왔다.

그랬구나. 콘라딘은... 그랬구나....

 

그 마지막 페이지:

 

 그렇게 나는 H로 시작하는 이름들만 빼놓고 명단 전체를 훑어 내렸다. 그리고 다 읽어 내렸을 때 나는 우리반이었던 마흔여섯 명 중 스물여섯 명이 천년제국을 위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명단을 내려놓고 - 기다렸다.

 10분을 기다리고, 30분을 더 기다리는 내내 나의 오래전 과거라는 지옥으로부터 온 그 인쇄물을 바라보면서. 그것은 초대도 받지 않고 와서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며 내가 잊으려고 그처럼 애를 썼던 무엇인가를 긁어 올리고 있었다.

 

어린 한스에게 친구와의 원치 않는 이별, 그것도 누군가의 잘못이 아닌 사회의 잘못으로. 그게 나의 잘못인 양 타국으로 도망치듯 떠나야 했던 한스. 처음으로 외톨이에서 벗어나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에게 그런 차가움을 느껴야 했던 한스는 얼마나 그가 잊고 싶었을까.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음 한 편에 묻어두는 동시에, 그 결말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너졌겠지. 인생에서 뜯어내 버린 16년을 통째로 잊고 싶었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내게 들러붙어 괴롭히는 한 이름을 찾아볼 용기를 내거나 나 자신을 다그칠 수 없었다.

 마침내 나는 그 끔찍한 것을 없애 버리기로 했다. 내가 정말로 알고 싶거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를 다시는 보지 못할 텐데 그가 살았건 죽었건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문이 열리고 그가 걸어 들어오는 일은 정말로 불가능한 일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지 않은가?

 나는 조그만 인명부를 집어 들고 막 찢어 버리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내 손을 멈췄다. 그런 다음 마음을 굳게 먹고 떨면서 H로 시작되는 페이지를 펼쳐 읽었다.

 <폰 호엔펠스, 콘라딘.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 처형>

 

 

*

 

그때 아버지는 당대의 증거들이 부족하다고는 해도 유대인들에게 윤리와 지혜와 관용을 가르친 스승으로서, 그리고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예언자로서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음은 믿지만 어떻게 해서 그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여길 수 있는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는 십자가에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는 당신의 아들을 수동적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전능한 하느님, 자신의 아들을 도우러 가려는 갈망이 인간 아버지만도 못한 <성부>라는 개념을 불경스럽고 역겨운 것으로 보았다.

 

*

 

지금도 나는 그 아버지가 그네에 앉아 있는 어린 딸들 중 하나를 어떻게 밀어 주었는지, 아이의 하얀 드레스와 불그스름한 머리칼이 어떻게 새로 돋아난 연푸른색 사과나무 잎사귀들 사이로 빠르게 움직이는 촛불처럼 보였는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최근에 읽은 묘사 중 가장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시각적 묘사를 이토록 서정적인 비유로, 게다가 아버지의 따듯한 사랑까지 마음에 생생하게 그려지게 할 수 있다니.

 

*

 

 

그런 것들은 그저 추상적인 이야기 - 숫자, 통계, 정보였다. 한 사람이 백만 명을 위해 고통스러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세 명의 아이들, 내가 알고 있었고 내 눈으로 보았던 그 아이들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

 

그 무엇으로도 어린 두 소녀와 한 소년이 불에 타 죽은 것을 설명하거나 변명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의 말 모두를 맹렬하게 반박했다. "너 그 애들이 불타는 건 차마 못 보겠지?" 내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그 애의 비명 소리도 못 듣겠지? 그러면서도 네가 두둔을 하고 나서는 건 하느님 없이 살 수 있을 만큼 용감하지 못해서야. 힘도 없고 연민도 없는 하느님이 너나 내게 무슨 소용이지?"

 

 

*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더 이상 삶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이 가치 없으면서도 어떻게 해서인지 유일하게 가치 있는 삶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인 것 같았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슨 목적을 위해? 우리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인류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해야 이 잘 안 되는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을까?

 

 

*

 

 

저녁이 다가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나는 모두들 갈 때까지 기다렸다. 마음속으로 여전히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내가 그를 가장 필요로 하는 이 때에 나를 도와주고 위로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서. 하지만 내가 학교를 나섰을 때 길은 겨울날의 백사장처럼 싸늘하고 텅 비어 있었다.

 

 

 

*

 

 

아마도 어느 날엔가는 우리의 길이 다시 서로 만나겠지. 언제까지나 항상 너를 기억할게, 친애하는 한스! 너는 내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어. 나에게 생각하는 법과 의심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의심을 통해 우리 주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법도 가르쳐 주었어.

 

 

아, 지금 콘라딘의 편지를 다시 읽으니. 콘라딘은 언제나 한스와의 우정에 진정 충실했다고 다시 한 번 느껴진다. 심지어 한스가 떠난 후에도 콘라딘은 한스와의 의리를 지켰다.... 콘라딘은 한스와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한스가 옳다고도 믿고 있었다... 콘라딘이 죽음을 맞은 건 한스가 그에게 (그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왔던 그의 주변 어른들의 가르침과) 사회의 시선에 현혹되지 않고 진실이 무엇인지 묻고 추구하는 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콘라딘.... 너는 이상적인 미래를 정말 믿고 있었구나.... 지금 잠깐은 이렇게 휘청일지 몰라도 미래엔 나아지리라고 생각했구나... 한스가 돌아오는 미래를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리고 히틀러가 네 선택과 믿음을 배신하고

현실이 네 생각과 희망처럼 흘러가지 않으니

한스의 자리를 만들어 주려고 했구나. 이상적인 미래를 네 손으로 이루려고 했구나.

 

 

 

*

 

 

 하지만 나는 더 잘 알고 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 그러니까 훌륭한 책 한 권과 한 편의 좋은 시를 쓰는 일은 결코 하지 못했다는 것을. 처음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했고 돈이 있는 지금은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마음속 깊을 곳에서 나는 나 자신을 실패자로 본다. 그것이 정말로 문제가 되어서가 아니다. 영원의 상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다 실패자들이니까. <죽음은 최후의 어둠이 오기 전에 결국 모든 것이 똑같이 덧없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의 삶에서 자신감을 갉아먹는다>라는 글을 내가 어디에서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 <덧없다>는 것이 옳은 말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내게는 적들보다 더 많은 친구들이 있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쁘기까지 한 순간들, 해가 지는 광경이나 달이 떠오르는 모습, 또는 산꼭대기들에 쌓인 눈을 지켜보는 순간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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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영화.

다른 어느 영화에 나오는 양조위보다도 춘광사설의 양조위를 가장 사랑한다.

 

"해피투게더" 라는 제목이 이질적인 듯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떠올릴 때마다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3 Amigos III

 

장국영의

- 여요휘,

- 다시 시작하자.

 

그리고

장첸과 양조위의 짧은 작별의 대화.

나는 말없이 녹음기를 들고

슬픔이 얼굴에 번지는 양조위의 연기 때문에

이 영화를 그토록 사랑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슬픔을 세상 끝에 두고 와 주겠다는 장도

슬프지 않다고 말하지만 속에는 상처가 가득한 아휘도.

 

저렇게 상처 가득한 얼굴로

슬프지 않다. 할 말 같은 거 모르겠다. 하며 머쓱하게 빼면

내 마음이 너무 슬프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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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둘 점수를 합치면 꼭 100점이네.

- 캉정씽, 넌 내 제일 좋은 친구야.

 

넌 제일 좋은 친구야.

원래는 기분 좋아야 할 이 말이 이렇게 안타까워 질수도 있다니.

 

마지막 장면을 처음 봤을때는

둘의 감정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나중에 생각을 다시 하고 나서야 알았다.

(위쇼우헝이 캉정씽에게 어떤 감정인지 잘 이해가 안갔다.

안 좋아한다고? 안 좋아하는 '남자'인 '친구'랑 잔다고;;?

그것도 먼저 시작했잖아...? 하는 생각에... )

 

그 전에 캉정씽이 위쇼우헝에게,

 

"나도 알고 싶어. 네가 내 비밀을 들은 다음에도 나와 친구하고 싶은지."

"난 널 정말 좋아해."

 

라는 물음에 대한 답임을 알고서야

이 영화가 정말 슬픈 결말이란 걸 깨달았다.

 

 

지금 보면

위쇼우헝 - 캉정씽 - 훼이지아가

서로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비슷비슷한 것 같다. 애정. 연애와 우정 뭉뚱그려서.

우정으로서 상대를 사랑하더라도 우정 그 이상으로 그 사람을 아낀다.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니 성별의 경계는 흐릿해진 듯 하다.

 

훼이지아도 현상한 사진들을 말릴 때,

위쇼우헝의 위에 캉정씽의 사진을 (위쇼우헝을 가리도록) 겹쳐놓았으니

훼이지아가 어쩌면 '위쇼우헝보다 더' 좋아하는 캉정씽인데

캉정씽의 마음은 애초부터 알고 있었으니

 

그와 자신이 이루어지는 것도,

자신과 위쇼우헝이 사귀는 상태에서

캉정씽의 사랑이 이루어져 둘이 행복하길 바라는 것도 할 수 없고.

(분명히 훼이지아는 캉정씽의 사랑을 이해해주었다.

보고 싶으면 가서 봐. 라고 말한 것도 훼이지아였다.)

위쇼우헝과 사귀고 있으니

캉정씽이 어쩔 수 없이 불행해질 걸 알지만

그가 상처 받는 것도 싫고.

 

어렵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들이 머리를 어지럽혔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훼이지아도 너무 불쌍하다ㅠㅠ 새우등 제대로 터지는 인물ㅠㅠ

 

훼이지아가 정씽의 마음을 고등학생 때부터 다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캉정씽을 사랑하는 마음에 힘내, 라고 적힌 음료를 방에 두고 간다던가.

자기를 부르는 전화에 한달음에 달려간다던가.

(보면 캉정씽은 항상 전화를 받기만 한다. 전화를 거는 인물은 어김없이 위쇼우헝/훼이지아)

캉정씽이 위쇼우헝 옆에 있어주라고 부탁하는 전화를 받았을 때

전날 밤에 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눈치챘겠지.

평소처럼 둘이 같이 한 방에서 잤다가 아침에 먼저 떠난다고 옆에 있어주라는 전화를 하겠냐.

그래도 간다. 캉정씽과 위쇼우헝이 걱정되니까.

 

위쇼우헝도 캉정씽을 단순한 우정으로서 사랑한 것 같지는 않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위쇼우헝이 아마, 둘을 가장 공평하게 사랑해서 가장 방황한 인물일 것이다.

캉정씽과 훼이지아, 둘 중 누구도 잃을 수가 없다.

하지만 자기가 어느 쪽을 선택하면, 상대방은 자기로 인해 불행해지겠지.

셋이서 함께 하고 싶지만 셋이 있으면 한 명은 불행해지는 상황.

특히나 외로움에 관한 트라우마가 아직 생생한,

아무도 자신의 친구가 되려하지 않는 것이 너무 무서운 위쇼우헝에게

둘 중 하나가 떠난다는 건 어떻게든 막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캉정씽과 잤고,

셋이서 함께하는 바다 여행을 무턱대고 계획했겠지.

 

영화 내내 계속 비춰지는 캉정씽의 시선.

- 위쇼우헝.

- 아직 기억하고 있어?

- 우리 관계는 규정에서부터 시작한 것을.

- 사실, 그때부터

- 난 네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 단지 내가 용감하지 못해서

- 다가갈 수 없었을 뿐이야.

 

- 나, 훼이지아.

 

(위쇼우헝 분명히 들었다ㅠㅠ 대답하지 못하겠으니까 못 들은 척 한거지.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주지 그랬어... 난 선택 못한다고.

아니면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어떻게 정하냐고 선 그어주지 그랬어. < 그러기엔 무서웠을듯)

 

결국,

넌 내 가장 좋은 친구야.

이 말은

네 비밀을 알아도(네가 날 연애감정으로 좋아해도)

난 너와 친구하고 싶어. 너를 잃기 싫어. 넌 여전히 내 가장 좋은 친구야...

 

어떻게 보면 내가 널 친구로 대할테니 너도 날 친구로 대해줘, 이 말 아닌가.

하지만 캉정씽은 임마 널 어릴 때부터 쭉 좋아해왔다고ㅠㅠ

학창시절의 전부였던 좋아하는 사람이 친구로 남아달라는 매정한 부탁을 하는데

캉정씽 마음이 어떻겠냐 진짜...

그리고 너랑 훼이지아를 보는 캉정씽 마음은 또 어떻고ㅠㅠㅠ

보내달라는데 좀 보내줘 임마ㅠㅠㅠㅠ 시간과 거리가 필요하대잖아!!!

 

 

 

자기도 어떻게 할 지 모르겠는 감정들 사이의 위태로운 줄다리기.

자기가 사랑하는 그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하고 막연히 바라지만

방법도 모르고 사실 내 마음도 잘 몰라서 방황하고 먹먹한 청춘들 이야기였다.

영화 내내 비춰지는 푸른 빛 색감이 묘하게 무덥고 습하게 느껴지던 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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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것

  빵집 아들의 운명은 도넛이다. 그렇기에 늘 텅 비어 있고, 그 텅 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살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김연수 작가의 깨달음이었다. <청춘의 문장들>에서 그 구절을 읽는 순간 갑자기 나는 나의 운명을 깨달았다. 나는 검은 건반이었다. 마음 어딘가에 늘 어두운 부분이 있고, 그 부분을 밝히기 위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 아무리해도 천성 저 바닥 밑까지 밝은 빛이 어리기엔 나는 좀 많이 어둡고 어느 정도는 불협 화음과 같은 존재였다.

 

 누군가가 도와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나도 나를 도울 수 없었다. 태어나길 검은 건반으로 태어났는데, 별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그것이 피아노 선생님의 딸로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깨달음이었다. 나는 검은 건반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유 없이 지치는 것이었다. 남들은 다 즐거울 수 있는 순간에도 혼자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괜히 사람들이 있는 곳은 피하는 것이었다. 혼자 있는 것이 마음 편한 것이었다. 밖이 불편한 것이었다. 어두운 책에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밝고 희망찬 책에는 왠지 모를 불신이 생기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세상은 결고 그렇게 따뜻하고 밝고 희망차지 않으니까. 햇빛은 피하게 되고, 흐린 날이 되어서야 기분이 좋은 것도 같은 이치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검은 건반이니까. 아무리 해도 그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거니까.

 

이렇게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글은 오랜만에 만나보았다.

나만 이렇게 우울하고 세상일이 벅찬 것일까.

왜 나는 이렇게 무기력하고 나약할까. 왜 나는 우울할까. 항상.

왜 나는 항상 행복하지 않을까.

"내가 이유없이 지치는 이유." 그걸 비로소 깨달았다.

나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던 것이 아니고,

'그저 난 그렇게 태어난 사람'임을.

그리고 나와 닮은 고민을 했었던 다른 사람을 알게 된 반가움.

 

 

 

 

- 일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이건 소제목도 너무 마음에 든다. 일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나로부터 나에게도 예의가 필요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자신에게 맡겨진 시간 안에서, 일상적인 세계의 일상적인 업무에 불후의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 같지 않은 그런 인물에게는, 진실이 어울리지 않는다." - 마이클 커닝햄
나는 막연한 꿈을 꾸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을 버티다 보니 나중에는 내가 무엇을 위해 버티는지도 잊어버렸다. 어느새 내가, 내 청춘이, 내 일상이 불쌍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나였다. 내 일상을 망치고 있는 것은. 내가 범인이었다. 내가 나를 불쌍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를 구원할 의무는 나에게 있었다. 매일은 오롯이 내 책임이었다.

 

마이카에서도 참 많이 되뇌었던 말이었다. 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

내 일상의 우울에 함몰되는 날이 참 많았던 것 같다.

내가 왜 초라하고 불쌍한지, 사소한 일들마저 트집잡듯 낱낱이 집어내고, 그리고 그만큼 더 비참해지고.

매일을 기도하듯 살아야지.

매일을 기도하며 살아야지.

마음이 우울해질 땐 노래를 들어야지. 도망가거나 붙잡히지 말아야지.

밀물처럼 우울이 덮쳐오는 날엔, 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숨 쉬는 것을 잊지 말아야지.

우울할 땐 과일처럼 상큼한 것을 먹고.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유튜브로 뉴에이지 피아노곡도 좀 들어보는거야. 그리고 책도 한 장 꺼내읽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하느님께 기도하기. 모든 걸 맡기고 편안해지기.

 

하지만 내가 결국 도착한 곳은 정신의 지중해였다. 내일의 태양을 기대하지 않는 것. 지금의 이 태양을 남김없이 사는 것. 영원히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영원히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았지만,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시지프처럼. 자신의 불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깨어 있으면서 결국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한 시지프의 공간이 바로 지중해였던 것이다.

묵묵히 하루 살아내기.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 배우다

강백호에게 농구를 잘할 수밖에 없었던 기본기가 있었던 것처럼, 나에게 인생을 잘 살 수 밖에 없는 기본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그 기본기를 키우기 위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고, 여행을 다니고, 뭔가 끊임없이 하고 있다.

 

비옥한 토양의 비유는 어느 직업에나 어울리는 것 같다. 결국에는 '나'를 피워내는 과정이니까.

나도 그렇게 열정 넘치는 사람이면 좋겠다.

바람이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기본기를 어렴풋이 알것만도 같다.

내가 친구들에게 곧잘 하는 이야기가, 마이카를 자퇴하고 오케드 입학을 앞둔 9개월이

나에게 어마어마한 지지대가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책 읽고 그림이나 조금 그리고. 완전하게 휴식을 취했던 나날.

홀로 단단해지기를 연습했던 날들. 혼자 글을 읽고 혼자 기록하고. 혼자 생각하고.

나란 어떤 사람인가. 무엇이 되고 싶은가. 내 구미를 당기는 철학은 무엇인가.

무궁무진하게 주어진 시간들을 나는 마음껏 즐겼다.

덕분에 내가 얼마나 그림이 그리고 싶은지를 다시 상기할 수 있었다.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대학 생활을 접은지 9개월만에. 나는 다시 학교가 가고 싶었다.

 

- 쓰기 위해 산다

 "그래도 불쌍하잖아."

 동생의 그 말에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장례식을 치르라고 말했다. 장례식은 원래 남아 있는 사람을 위한 절차니까. 동생은 아빠에게 감정이 남아 있고, 나는 동생에게 감정이 남아 있으므로. 나는 자리를 지켰다.

알베르 카뮈의 문체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읽고, 듣고, 보고, 경험하고. 지금까지 말한 그 모든 행위가 마지막에 '쓰다'에 도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점일지도 모른다. 나는 읽고서 쓰고, 보고서 쓰고, 듣고서 쓰고, 경험하고서 쓴다. 쓰고서야 이해한다. 방금 흘린 눈물이 무엇이었는지, 방금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왜 분노했는지, 왜 힘들었는지, 왜 그때 그 사람은 그랬는지, 왜 그때 나는 그랬는지. 쓰고 나서야 희뿌연 사태는 또렷해진다. 그제야 그 모든 것들을 막연하게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쓰지 않을래야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나는 많은 것들 가운데 기껏해야 몇 개만 쓸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손가락 사이로 후두둑 떨어져나갈 것이다. 나는 내가 쓴 것을 읽고, 그때의 경험을 음미하고, 손가락 사이로 떨어진 세세한 감정 같은 것들은 잊어버릴 것이다. 죄책감도 없이. 내가 쓴 몇 문장만 경험했다고 믿으며.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믿으며. 그것이 쓴다는 것의 어쩔 수 없는 맹점이다.

 

"요즘은 도무지 일기장에 쓸 말이 없어."

그를 좋아하는 만큼 나는 더 상처받았다. 그래서 썼다. 쓸 수밖에 없었다. 그 불안과 상처를 그에게 다 드러낼 순 없었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자존심이 셌다. 그리하여 말로 하기엔 너무 구차한 그 작은 상처들을 나는 일기장에 털어놓았다. 누군가에게는 털어놓아야 내가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면서는 쓸 말이 없었다. 나를 위로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나는 썼구나.

 

- 살기 위해 쓴다

처음 이 세계로 들어올 때 시험을 쳤다. 여러 문제 중 하나가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시오. 내가 그 사람을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가 그 편지를 본다면 연애 편지로 읽히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친구에게 보내는 일상적인 편지처럼 읽히도록 쓰시오.

 

롤랑바르트식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카피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네 번 괴로운 셈이다. 카피를 잘 못 쓰기 때문에 괴롭고, 그 사실에 스스로를 비난하기에 괴롭고, 내 무능력으로 프로젝트가 덜그럭거려서 괴롭고, 내가 그토록 평범하고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또 괴로워한다. (질투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에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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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10. 08:31